지난 달 말 싱가폴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반, 밤에 잠들기 전에 조금씩 해서 반의 반, 나머지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나 보다. 책이 교보에 깔린 지도 꽤 됐고 어디서인지 호의적인 리뷰들도 종종 보았던 것 같다. 아프간 이민자 출신의 작가가 그가 어린 시절의 보낸 도시 카불을 배경으로 그려낸 두 소년의 우정이 소재라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현재 삶의 터전일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의 고국에 폭탄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이 그의 소설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주었을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 아프간이라는 나라를 세밀하게 그려낸 글을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처음으로 읽어본다는 사실이 기대감을 키워주었다.
KBS 아침 방송에서 'TV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6.25 직후나 60-70 년대와 같이 나름대로 어려웠던 시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제작해서 보여주곤 했었다 (지금도 계속 보여주고 있을지도). 한동안 그런 드라마들을 즐겨보곤 했는데 마님과 같이 제일 재미있게 보던 것으로는 「모정(母情)의 세월」이라고, 미혼모라서, 또는 가난한 나머지 어린 딸을 버리고는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던 두 여자들이 집주인과 가정부로 만나 서로 위로하며 잃어버린 딸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우연히도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 친구가 된 그 여자들의 버림받은 딸들이 성인이 되어 힘들지만 따뜻한 이웃들의 도움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던 드라마가 있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작위적인 구성에, 어떻게 끝날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뻔한 얘기인 걸 부정할 수 없는데도 저 모녀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 것이고 (사실 만나기는 한참 전에 만난다. 서로가 어머니'들'이고 딸'들'이라는 걸 몰하서 그렇지 -_-) 버리고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화해할 것이지가 궁금해서 결국 마지막회까지 보고 말았다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닌 것이 나름 뜻밖이었다).
『Kite Runner』를 읽으며 그 드라마가 떠올랐고 그래도 등장인물의 묘사는 차라리 드라마 쪽이 낫지 않았나 생각했다.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는 작위적인 설정에 선량한 인물은 한없이 (요즘 말로 거의 '뇌가 없어' 보일 정도) 선량해서 '선량'과 '비굴' 사이의 정확한 경계가 무엇인지 의심스럽게 만들고 그외 모든 인물들이 화자인 아미르를 포함해서 몹시도 얄팍하고 평평하다 -_- 아미르가, 평생을 괴로와하게 될 그 '죄'를 저지르기 전까지 두 소년이 자라는 과정을 그리는 전반부는 그래도 괜찮았다. 여전히 가난한 하인 계급이며 아프간 사회에서 오랜 동안 차별을 받아온 하자라 (Hazara) 민족 출신의 소년이 부유한 상류계급이며 주인집 아들이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의 다른 소년에게 무조건적인, 서로 다른 처지에 대한 절망이나 질투 같은 건 한 점 섞일 틈이 없는, 그런 사랑( "Fou you, a thousand times over!" )과 신뢰를 보낸다는 얘기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 부유한 소년이 느끼는 가난한 소년에게 느끼는, 아버지의 사랑을 두고 느끼는 묘한 질투심이나 열등감, 은근한 죄책감엔 성인이 된 소년의 자기 연민이 더 짙었고 은근히 patronizing 하다고 해야할지, 살짝 재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전반부는 그럭저럭, 정말 그럭저럭 읽을 만 했다.
연날리기 대회가 있던 날 하산이 이웃에 사는 전형적인 악당이 스테로오타입 같은 소년에게 강간을 당하고 나약한 소년 아미르가 그 모습을 담장 뒤에서 숨어서 지켜보며 하산을 배신하게 된다는 그 사건 이후의 전개는 상당히 '거시기' 하다. 아미르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기왕 시작한 배신이니 끝장을 보겠다고 하산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그렇고 기왕 조건없이 헌신하기로 했으니 변명도 안하고 쫓겨나겠다는 하산을 보는 것도 희미하게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_-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고, 아미르가 아버지와 함께 아프간을 탈출해서 미국에 정착하는 부분은 그냥 평범했다. 하지만 이 책에선 의외로 평범한 부분이 차라리 나은 경우가 많다고 해야겠다. 그럭저럭 전망있는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후 과거의 죄를 씻겠다고 탈레반 정권 하의 아프간으로 돌아가서 일어나는 사건들, 소위 밝혀지는 진실이라는 것들은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이다. 평소 신파와 멜러에 사족을 못쓴다고 공언하고는 있었는데 앞으로는 '음악과 드라마, 영화 같이 뭔가 다른 구성 요소들이 보완을 할 수 있는 그런 장르'에 국한된 얘기라고 해야겠다. 순전히 글로 이루어진 매체에서는 안되겠다, 도저히 참아주기가 힘들다. 숨겨졌던 출생의 비밀이니, 대를 이어 강간당하는 부자에 어린 아이의 자살 기도까지, 온갖 선정적인 소재들을 우겨넣어 선량하다는 등장인물을 바닥까지 던져넣는데, 읽는 이의 눈물을 쥐어짜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_-
하산과 같은 인물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다는 게 이 책을 감동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의 비참한 삶과 죽음이 조건없는 헌신적인 사랑의 구현으로 해석되고 감동을 위해 이용되는 게 싫다.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patronizing 하는 태도를 고수하는 화자의 어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을 읽고나서애경 리브로에서 우연히 보고 사서 읽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서 위키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묘한 우연이다. 그런데 기사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예전에 정기구독을 하던 시절에도,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사진이 멋진 것에 비하면 기사가 항상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여전하구나 싶었다 -.-;;; 그럼에도 자극을 받아서 1년간 정기 구독을 결제해 버렸다는 것...
싫다는 소리를 잔뜩 써놓고 이러려니 다소 낯뜨겁기는 하지만, 같은 작가의 두 번째 책 『A Thousand Splendid Suns』을 읽어보기로 했다. 역시나 헌신적인 사랑의 얘기라고 하는데 이번엔 여자들이 주인공이고 하산과 아미르처럼 어느 한 쪽이 월등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10,000 이하의 포켓북 에디션이 나올 때까지, 전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