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에서 혼자 중얼중얼 욕을 하는 남자는 무섭다. 다리를 잔뜩 벌리고 의자 두 칸을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차지하고 앉아서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고 머리만 치켜든 모양은 약이 오른 독사를 생각나게 한다. 살짝 풀린 눈으로, 뭉개진 발음으로, "씨발, 다 죽여버려" 하고 중얼거리면, 특별히 나를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섬뜩하다. 그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아서, 그가 정말로 아무나 죽여버리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날 죽이는 게 제일 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더 떨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귀를 막고 음악을 듣느라 아무 것도 못들은 척하고 눈을 감아 보지만 음악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은 더 올리가 없다. 아니다, 잘못했다, 눈을 감는게 아닌데, 이러고 아무 것도 못보는 사이에 저 남자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쩌나 불안해진다. 그런데, 눈을 뜨자니 또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봐 무섭다. 한국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싸움이 붙은 일은 대개 한쪽이 상대더러 왜 쳐다보냐고 시비를 걸며 시작된다는데 혹시 그런 재수없는 경우가 생기면 어떡하나 싶다. 아, 지하철이 멈췄다. 벌떡 일어나서는, 맞은 편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다음 칸으로 옮겨간다. 혹시 쫓아오기라도 할까 조금 불안하다. 너 지금 나를 피해서 옮겨가냐, 내가 똥이냐 전염병이냐, 하고 대거리라도 하면 어쩌나 싶다. 한 칸 더 옮겨갈까 하고 망설이다 다음 칸엔 앉을 자리가 없을 것 같아 그만 둔다. 이 모든 게 오바일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예전에 술에 취한 부친도 특하면 '다 죽여버리마' 하고 중얼거렸지만, 내가 아는 한 실제로 누군가를 죽인 적은 없다. 문득 부친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질 않아 주변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인가 한다. 아니다, 그 대신 음주운전을 해서 정말로 여러 사람을 위험하게 하곤 했구나, 다행이라는 말은 못하겠다. 각설하고, 만에 하나,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퇴근길 S 씨, 지하철에서 피살, 범인은 맞은 편에 앉았던 40대 남 A 씨, S 씨가 자꾸 흘낏거리며 쳐다보는 게 못마땅해서 홧김에 범행'이라는 기사가 뜰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네이버엔, '재수없이 흘낏거리니까 죽었지, 쌤통이네 ㅋㅋㅋ'하는 덧글이 달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하철 '흘낏녀'라고 부르는 쉐이가 생길지도 모른다. 혼자 중얼중얼 욕을 하다 왜 쳐다보냐고 시비를 걸며 달려드는 아줌마는 격투(? -_-) 끝에 물리친 적도 있지만, 아저씨는 안될 것 같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비루하구나, 중얼거리지만 달리 뽀족한 수는 없다. 그래도 여지껏 살았는데 이제 와서 인터넷 한 줄 뉴스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남자, 따라오지는 않는다. 다행이다.



by 싸락눈 | 2009/09/01 00:41 | 별일? 별것?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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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John_Doe at 2009/09/01 16:02
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건...
차를 사시면 됩니다. 쿨럭;
Commented by 싸락눈 at 2009/09/01 17:27
돈을 주실래요? :-/
그리고 이건 제 문제만은 아니죠.
저야 또박또박 아직은 나오는 월급 모아서 똥차라도 한 대 산다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도 꽤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절대 '차를 사는' 게 아닙니다.
알면서...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 <- 요건 적절한 톤으로 읽어 주시고요.)
Commented by Louise at 2009/09/04 14:15
아. 무서워요. 정말, 저도 이런 생각 많이 하거든요.
싸락눈님이나 저나.. 참 소심한가봅니다.
Commented by 싸락눈 at 2009/09/05 21:49
뭐, 지하철 타고 다니다 보면 저런 사람들 종종 봐요 :-)
이런데 특별히 대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제게 별나게 소심하다는 생각은 안해요.
저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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