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자막판을 먼저 보려고 했다. 더빙판이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왔지만 평소 이순재 할배의 앙다문 이 사이로 한 마디, 한 마디가 기를 쓰고 빠져 나오는 것 같은 발성에 거부감이 있던 터라 '디지털3D'에는 꽤나 혹 하려던 마음이 아니, 그래도 안 되겠어, 하고 도리질을 쳐서 말이다 -_- 그런데 자막판을 이렇게 드문드문 틀어주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침 첫 상영을 보고 오후엔 다른 일을 좀 하려고 했더니만... 12 시 이전엔 아예 틀어주질 않는다 on_ 할 수 없이 더빙판을, 기왕 더빙을 볼 바엔 당연히 디지털3D로, 보고 왔다. 결론은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거... 이순재 할배와 주인공 할배의 싱크로는 괜찮은 편이다. 아이 녀석도 혹시 손발이 오그라들게 착한 목소리면 어쩌나 했더니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3D는 볼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
얘기는, 특히 결말은, 여러 모로 디즈니스럽다. 외로운 사람들이 친구가 된다는 것. 단순하고 밝고 낙천적이고, 당연히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는 결론이다. 딱히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워낙 여러 번 본 얘기고 '디즈니'하면 그냥 팍! 하고 떠오르는 방식이라서 그리 신선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는 대체로 좋았다. 처음이 제일 좋고 중간의 요란법석 모험은 그저 그렇고 마지막도 처음보다는 못했지만, 이런 걸 보고 눈물이 나려 하다니 좀 한심하단 말이닷!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울컥하게 만드는 그런 장면들이, 몇 번씩 있었다 - 폭포 옆(?)에 나란히 남겨진 한 쌍의 의자들은 얼마나 다정하면서 쓸쓸한지 빠르고 세차게 눈을 깜빡여 눈물을 막아내야 했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 꿈꾸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함께 살아온, 대체로 행복했지만 슬픈 날이 없지는 않았던 세월도 나름 모험이었다는,
비겁한 변명 얘기에 '어쩌면 정말 그럴 지도 몰라' 하고 잠시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 노인네가
지팡이 짚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배경 음악이 비제의 카르멘 중 하바네라... -_- 할배 저기서 춤이라도 춰야하나 하다가 ㅋㅋㅋ, 음악이 정말 월-E 못지 않게 재미있는데 CD로 안 낸다니 아쉽다. --->
다시 보니 계단은, 난간에 붙은 전동 승강기(?) 같은 걸 타고 내려온다. 우리 나라 지하철역 계단에 설치해 놓은 장애인용 리프트랑 비슷한 것 같다. 이런 게 개인 주택에 달 만한 규모로 나오는 게 정말 있을까? 하고 잠깐 궁금했다.* '개망신 깔때기'가 영어로 뭔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자막판을 꼭! 봐야겠다 :-D --->
'Cone of shame'이라는구나. 뭐 거의 문자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데 '개'가 강렬하긴 하다. 영어에는 비슷한 거 없으려나? 아무데나 붙여놓으면 원래의 뜻이 몇 배로 강조되는 접두사라든가... 그러니까 '개' 같은 거...* 아들의 뱃지 수여식장에 혼자 앉아 있는 러셀 엄마를 보고 마지막으로 울컥 ㅠ.ㅜ --->
그러니까 러셀의 아빠는 '필리스'라는 여자랑 따로 나가 산다는 말이겠지? 필리스와 바람이 나서 애랑 애 엄마를 버린 것인지 애 엄마랑 바람을 피우다 필리스에게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애 엄마는 애 엄마고 필리스는 필리스인지... 경우의 수가 너무 많구나.다시 보니 역시 애들은 어딜 가나 '민폐'로구나 하는 생각이..., 쿨럭. 몸도 마음도 작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세상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절이라고 너그럽게(?) 받아들여야지 하다가도, 이 쬐끄만 노무 쉐이가 영감님한테 새를 그냥 포기해 버렸느니 맥없이 주저앉아 잡혀가는 걸 보기만 했다느니 하고 나오는 데는 정말, 어휴, 저 뻔뻔한 쉐이가 어따 대고 저런 소릴! 꿀밤 뷁만 대를 먹어주면 속이 좀 시원하려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시 보면서 먼치 영감님이 참 안 됐다는 생각을 했다. 업적(?)을 조작했다는 혐의는, 그 동네 밥을 먹고 사는 누구에게나 참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을 거다. 그저 명예를 회복해 보겠다고,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좋은 시절을 정글에서 개 떼들과 새 쫒는 데 다 보내고 관절에서 우둑우둑 소리가 나는 노인네가 되어서야 겨우 뜻을 이뤘는가 싶더니 결구 그렇게 허무하게 가고 말았다...T^T 주인공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다니던 사람을 착하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그도 나름 필사적이었단 말이다. 생물학자나 탐험가가, 주인공들처럼 쉽게 '자연의 친구'라고 말하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동으로 악당이 되는 것도 아니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