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탑(?)

'두 개의 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봐...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읽었던 것들이라 어떤 걸 먼저 읽었고 나중에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그래도 제일 오래된 건 분명 『시멘트 가든』(이안 매큐언) , 작년 가을 학회 때 부산의 호텔에서 읽었구나. 매큐언의 초기작들이 『속죄』와는 영 분위기가 다르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확실히 기괴하더라. 왜 그렇게 기괴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친상간, 자위, 죽음, 시체유기 등등의 자극적인 얘기들로 가득하면서도 묘하게 나른하고 조금 지루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그냥 그렇다는 얘기인가? 싶었고.

『생존의 비용』『보통 사람을 위한 제국 가이드』는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나서 연달아 읽었던 책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이 아닌 책들을 읽어보고 싶어서 『작은 것들의 신』과 함께 부니에게 삥뜯었다 (부니야, 마니 땡스 -.-). 『생존의 비용』은 인도 정부의 무분별한 초대형 댐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다. 실제적인 경제 가치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도 못하고 수몰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나 수몰 지역 주민의 생존권에 대한 대책도 없으면서 무조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점차 구심점을 잃고 지지부진해지는 저항운동 진영에 대해서도 역시 쓴 소리를 던졌던 것 같다. 강물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수로를 팔 예정이라는데 지도 상에 나타난 길이가 정말 어마어마한 게 2MB 정부가 파겠다는 대운하보다도 길어보였던 게 기억에 남는다. 『보통 사람을 위한 제국 가이드』에서의 '제국'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기업 중심 세계화' 이다. 여섯 편의 에세이는 하나하나가 칼날이고 비판의 대상과 내용이 뚜렷하다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에 가난은 범죄이고 더 가난해지는 것에 항의하는 것은 테러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의 시대에 가난은 암암리에 테러와 융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머지 않아, 지금 이 곳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나 마음이 답답해진다.

『근대 그림속을 거닐다』(이택광)은 재미있게 읽은 편이지만 살짝 실망스럽기도 했다. 잘 모르는 분야이다보니 내용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은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구나 하지만, 또 사실 처음 들어보는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아서 불만이 없지만 저자의 글 쓰는 방식은 좀, 많이 재미없다. 남보다 더 아는 사람이 그렇지 않을 사람들을 위한 쉬운 글쓰기를 지향하는 거야 언제나 고마운 일이지만 반복해서 '내가 쉽게 쓰려고 애쓰고 있거든' 하고 강조하는 게 별로 보기 좋지는 않다. 쉬운 글쓰기의 한 방법으로 유머를 사용하려는 모습도 노력은 가상한데 좀 썰렁하다. 책 자체는 종이 질도 좋고 화보도 이 판형으로는 시원한 편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세상엔 참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겠지만.

『마지막 기회』(더글러스 애덤스, 마크 카워다인)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책보다는 BBC 에서 방영했다는 다큐멘터리 쪽이 더 보고 싶어졌다. 애덤스의 쉬임없는 썰렁한 농담도, 문득문득 비치는 사라져가는 것들과 그들이 사라져가는 이유가 된 동료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TV 화면 쪽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신은 위대하지 않다』『자비를 팔다』를 연달아 읽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던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비교했을 때 왜 사람들이 종교에 빠지는지를 어떻게든 설명해보려고 한 도킨스보다는 종교가 일종의 사기라는 주장에 촛점을 맞춘 것 같은 히친스의 책들이 확실히 더 재미있게 읽힌다. 얼마나 집요하고 광범위하게 종교의 위선을 공격하는지 또 그게 얼마나 적절해보이는지 여기에 대항에서 반격을 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마더 테레사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원래 호감 반 의혹 반이었는데 이제 호감은 사라지려는 것 같다. 그가 운영하던 '죽음의 집'이 실제로는 '죽어가게 내버려두는 집'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인 것 같다 -_-) 용서가 되질 않는다. 그 많은 기부와 후원금들을 대체 어디에 다 쓰고? 죽게 내버려두는 집?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는구나.

『Q&A』(비카스 스와루프)는 일단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아주 좋은 책, 오래 기억할 만한 글은 아니구나 하고 있었다. 모든 갈등이 우연과 행운의 도움으로 해소되는 구성은 아무래도 싱겁고, 통쾌한 순간보다는 '아니, 뭐 이따위가 다 있어' 하고 기가 막힐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인도인이 쓴 인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아무래도 흔치 않은 경험이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잘 알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그리면서 '거기서는 사기꾼도 스승' 이라는 식의 관광객 마인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돈과 사랑과 우정을 모두 얻고나서 벤츠와 페라리를 동시에 굴리게 되었다는 주인공이 벤츠의 뒷범퍼에 페라리도 갖고 있음을 자랑하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귀엽기도 했다 :-)

『Writing with Intent』(Margaret Atwood)는 처음 읽어보는 애트우드의 산문집이다. 에세이, 리뷰, 서문, 후기, 심지어 죽은 사람에 대한 추도문까지 아주 잡다하게 모아 놓았고 굉장히 재미있다. 여기에 실린 캐나다판『빨강머리 앤』의 후기를 읽고 책을 다시 읽을까 하다가 옛날 옛날 KBS 에서 방영했던 애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전체 50부 중에서 이제 딱 열 편을 봤는데 예전에도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이렇게 좋았었나 하고 새삼 놀라고 있다 (가을이가 『빨강머리 앤』을 볼 나이인지 『미래소년 코난』을 볼 나이인지 아직 고민 중이다). 토니 모리슨의 『Beloved』에 대한 열렬한 찬양에 가까운 리뷰도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애트우드가 리뷰어로서의 자기 자신을, 살살 쓰다듬어 주는 'stroker' 라고 직접 말하긴 하지만 『Beloved』와 모리슨에 대한 리뷰는 아마도 의례적인 '쓰다듬어 주기'와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캐다나 출신의 작가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다룬 에세이가 몇 편 있었는데 뭐랄까 좀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나에게도 캐나다라는 나라를 미국 위에 붙은, 미국하고 여러가지로 비슷하지만 미국은 아닌, 미국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차선으로 선택하곤 한다는 나라이고 이렇다 할 개성이 없어보이는 나라이다. 애트우드도 갓 작가가 되었던 시절 뉴욕이나 런던처럼 '잘 나가는' 곳이 아니라 캐나다, 밴쿠버라는 '없어 보이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몹시 어색했다고 한다. 지금의 애트우드의 위상(?) 같은 걸 생각하면 뭔가 어리둥절한 얘기다 싶기도 하다만 그 시절엔 그렇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의 작가들 중에서도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비슷하게 얘기한 경우가 있었던 같기도 한데..., 흠.

『백귀야행』(이마 이치코)시리즈를 계속 모으는 건 어느 정도 '관성'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아직 애정이 남아있어서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처럼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여전히 좀 오래 들여다 보고 싶은 장면들이 보이곤 한다. 은근히 응원하던 아키라와 사부로는 결국 맺어지지 못했지만 리쓰의 집 뒷마루에서 아키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는 풍경은 귀엽고 아련하고 뭐, 이럴 수도 있겠지, 하다가 이 둘은 이제 이걸로 끝나는구나, 생각하니 또 아쉽기도 했다. 권교정『청년 데트의 모험』『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끝까지 따라가고 싶은 국내 작가의 작품들. 부디 완결까지, 중단 없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ㅠ.ㅠ 내게 강경옥은 80년대의 작가이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 그 시절에 나온 것 같다. 물론 아직 활동 중인 작가이니 만큼 언젠가 괜찮은 작품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정말 좋기야 하겠지만 그 시절 이후의 강경옥은 아직까진 실망스럽다. 강경옥의 단편을 남들만큼 좋아했던 것 같진 않지만 『이미지퍼즐』을 구입했다. 내가 기억한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것들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작가라는 걸 알 수 있었고 나쁘지 않았다.

『꼬마 마녀』(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는 어렸을 때 양호실 청소 당번을 하면서 양호실 책장에 꽂혀있던 걸 조금씩 읽었던 적이 있다. 생긴지 얼마 안되는 학교라서인지 도서실이 따로 있질 못하고 양호실 한 구석에 책장 두어 개 놓고 양호실 겸 도서실이라고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그 양호실도 교무실 앞 복도에 칸막이 쳐서 만든 날라리, 쿨럭. 그 때 읽었던 책의 제목은 '작은 마녀'였고 모든 문장이 '~읍니다'로 끝났다. 새로 산 책에선 '이랬어, 저랬어" 하는 반말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꽤 재미있다. 번역도 자연스럽고 삽화도 내용과 잘 어울리고, 여전히 굉장히 재미있는 걸 보면, 좋은 책이야~ (아주 단순한 결론).

『세상을 바꾼 12 권의 책』(멜빈 브래그)은 작년 학회 때 부산역에서 샀다. 한동안 안 읽고 놔두고 있다가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게 되었다. 멜빈 브래그가 직접 진행자로 나오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 적당히 드라마화된 형태로 전달되는데 별 기대 없이 보기 시작했다가 의외로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다. 저자가 선정한 12 권이 책이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바꿨다는 얘기도 납득할 만하다. 물론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뉴턴의 『프린키피아』같이 듣자마자 감이 오는 책이 있는가 하면 『축구협회규정집』이나 『아크라이트 방적기 특허 신청서』처럼 설명이 필요한 책(? 사실 '특허신청서' 같은 문서를 책이라고 하기엔 좀 무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들도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깍아내리거나 '그릇된 사상에 세뇌당한 아시아 국가와 여전히 오염된 몇몇 유럽국가에서 발견되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통렬히 비판한 어떤 경제학자에게 동의하는 모습, '자유로운 시장'을 받아들이고 나서 '눈부신 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는 인도와 홍콩, 중국에 대한 찬사 같은 것들을 보면 이 사람의 정치적 입장 같은 걸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런 부분은 다큐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큐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책에서는 저자 자신이 영국 출신이기에 영국 작가의 책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 자신감과 그 자신감이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하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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