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를 정해놓은 '사랑의 법(Love Law)'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한국어 판 '작가의 말'에서 로이는 이 소설이 어떤 특정한 장소나 관습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소설의 배경인 인도나 인도의 그 유명한 '카스트'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그 대신, 들과 땅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서 '카스트(caste)'로 검색을 했을 때 첫번째로 나오는 페이지에서는 ('위키'의 기준으로는 레퍼런스나 사실 관계의 증명이 다소 불충분한 문서라고 했지만) '카스트'를 전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경직된 social classification system 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도의 카스트에 관한 호러스러운 얘기들를 들으며 '미친 나라야' 하고 부르르 한 번 떨어주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돈(만)이 새로운 신분의 기준으로 완벽하게 자리잡은 것 같은 동네에서도 '집안의 뼈대'라든나 '가문의 영광'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을 무리지어 나누어 놓고 무리 안에서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살라고 종용하는 시스템이 언제 어디에서는 존재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시스템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런 추악함과 잔인스럼움 역시 인간 본성의 일부일 것이라고 믿게 된다.
처음부터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읽은 책들은 사실 언제나 좋았다 -_- '좋아할 것 같다'는 예감이라기 보다는 '좋아하겠다'는 다짐이라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세 줄 요약의 줄거리가 아무리 아침드라마스럽더라도 글자로 이루어진 소설엔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아버지의 성(姓)과 남편의 성(姓) 사이에서는 실제로 선택할 만한 게 없다는 걸 알아차린 젊은 여자 아무는 이혼을 하고 쌍동이 남매를 데리고 친정에 얹혀서 살아간다. 시작부터 미래가 없는, 작은 것들만 약속하고 작은 것들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던 아무와 벨루타의 사랑은 벨루타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이 난다. 아무의 쌍동이들, 서로의 생각과 감정과 꿈까지 하나로 나누던 라헬과 에스타도 벨루타를 사랑한다. 이혼하고 돌아온 딸의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외할머니, 불행한 사람이 다른 불행한 이를 죽어라 미워하는 알 수 없는 악의로 아무와 그의 아이들을 미워하는 고모할머니 막내 코차마, 다정하지만 진심으로 깊이 사랑해주지는 않는 외삼촌 차코의 틈에서, 아이들이 발라주는 빨간 매니큐어를 물리치지 않는 벨루타는 아이들에게도 위안이고 구원이다. 아무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어차피 죽을 사람이고 그들이 어떤 말을 하든 달라질 것은 없다고, 그렇게 꼬드기는 막내 코차마의 말에 아이들은 벨루타를 버린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단 2주라는, 차코의 전처 마가렛이 딸인 소피를 데리고 아야메넴을 방문하는 짧은 기간 동안에 모두 일어나지만 그 뿌리는 깊이 깊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먼 옛날 '사랑의 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그때까지 파고든다. 소피의 장례식 날, 토마스 매튜 경위가 경찰봉으로 아무의 가슴을 톡, 톡, 톡 하고 두드리고 굳은 얼굴의 아무가 눈물을 흘리며 쌍동이들과 버스를 타는 걸로,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는 곧이어 짐을 싸서 떠나야 했고 퉁퉁 부은 얼굴로 가슴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숨을 쉬다가 쓸슬하게 죽어갔고 쌍동이들은 자라서 아무가 죽어간 나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서른 한 살이 될 때까지도 그들이 사랑했다가 버린 남자의 기억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침묵과 공허로 가득한 인생을 그냥, 살아간다.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쌍동이들의 죄책감에 관한 것이었다. 깊이 사랑한 만큼, 억울한 죽음을 방조했다는 사실을 그저 나이가 어려서라거나 막내 코차마의 계략에 넘어가서 그랬을 뿐이라고 쉽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공손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에스타의 침묵, 라헬의 공허와 아무런 애착이나 야망 없이 그냥 흘려버리는 인생에 대한 묘사는 정말 스산하고 마음이 아프다.
1997년도 부커 상을 수상한 작품이니 전문적인 평론가들의 의견은 좋은 쪽이겠거니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MS 워드로 옮겨적는다면 fragmented sentence 라고 화면 가득 초록색 줄이 가득하겠구나 싶은 문체가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신경숙 씨처럼 (요즘의 신경숙 씨는 읽어보질 못해서 모르겠다) 나직하고 머뭇거리는 것 같은 문체인가 싶었지만 얼핏 닮아보이는 짧은 문장들이라도 로이의 것이 훨씬 단호하고 직설적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소설 못지않게 소설에 얽힌 뒷얘기들이 흥미로웠다. 특히 바사미언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이 소설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소설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제대로 말하려 하지 않는다' 고 한 말이 그랬다. 그들은 소설이 어린아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절대로 카스트에 대한 이야기, 낡은 관습과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쓰고 싶은 대로 쓴 첫 소설이 부커 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지금 다시 또 소설을 쓸 생각이 없다는 작가의 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이미 주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야겠다. 어떤 이들이 '나를 찾겠다' 며 찿아가곤 한다는 나라와는 많이 다른 그의 조국 인도가 그가 원하는 대로 더 합리적이고 평등한 그런 모습이 되기를, 앞으로도 '본 대로 쓰고 쓴 대로 행동한다'는 신념에 따른 인생을 그가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싫다'고 하는 것보다 뷁 배는 더 힘들다 -_- 이래서 고백은 어렵고 험담은 쉬운 거구나... 하다가, 책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들 누가 차기라도 한다구? 하고 보니 그냥 글을 잘 못쓰는 것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 마는구나, 훗... 내용 없는 글이 갈수록 길어지는 증세를 보면... 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