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여자, 진실, 침대, 아비, 작은 것들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을 재미있게 읽고 나서 고른 책 『성의 미학』은 아쉽게도 『춤추는 죽음』 만 못했다. 어쩌면 책의 실질적인 저자가 진중권이 아니라 는 미와 교코이고 진중권은 원고를 번역하며 특유의 문체만을 덧입히게 되어서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처음부터 한 권의 책을 위한 기획이 아니라 잡지에 연재된 내용을 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후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각각의 챕터가 따로따로 읽기에는 재미있지만 『춤추는 죽음』에서와 같은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주제의 묵직함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 책을 내기 전에 이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별도의 작업을 덧붙였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여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썩 괜찮은 작품이라는 소문을 어찌어찌 들어왔기에 골라본 『책 읽어주는 여자』는 그냥 좀 당황스럽다 -_- 목소리 좋은 여자 콘스탕스와 그녀의 서비스를 찾는 사람들의 만남은 대체로 시작만 흥미롭다. 콘스탕스가 읽어주는 책들에 대한 사유와 감질나게 보여주는 구절들은 흥미로왔지만 콘스탕스 자체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사이보그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난, 감정의 표현이 좀 더 끈적이는 사람들을 좋아하나 보다. 세상만사를 재미없는 책을 읽어나가는 것처럼 기술하는 1인칭 시점엔 정을 붙일 수가 없다. 소설은 시작도 결말도 갑작스럽다. 내가 읽은 글자들이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냥 글자였구나... 하는 마음이라니 뭔가 크게 손해를 본 것 같다. 책 뒤에 붙어있는 번역자 김화영과 레몽 장의 대담을 읽으며 적어도 이 두 사람들은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공감한 것이겠지 하며 또 좀 섭섭해졌다. 본문의 폰트가 아주 예쁘다는 것 정도가 위로라면 위로일까.

한강의 CD 사건 :-D 이후 처음으로 나온 그의 소설을 다시 샀다. 모님과는 달리 그럼에도 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고 앞으로도 이 사람의 책은 종종 사서 읽게 될 것이다. 이번 책도 이 사람의 소설을 읽으나면 언제나 그렇듯 뭔가 심심하고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면서 또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준다. 단지 이번엔 조금 심심하고 이것보다는 좀 더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싶은 느낌이 좀 더 컸다.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 굳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박식한 척 할 필요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허둥대지 않아도 되었으며, 패션 카탈로그에 나오는 남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위축될 까닭도 없었다. 이십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 노력해도 근육이 붙지 않는 가느다란 다리와 팔뚝, 남모를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작은 성기까지, 그녀에게는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언제나 나는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나보다 두세살 어린 조무래기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자라서는 넉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며, 내 대단찮은 능력을 귀하게 여겨주는 작은 회사에서 내세울 것 없는 월급이나마 꼬박꼬박 받을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예쁘다거나, 총명하다거나, 눈에 띄게 요염하다거나, 부유한 집안의 따님이라거나 하는 여자들은 애초부터 나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다.

표제작인 「채식주의자」의 도입부에 나오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의 이 독백은 뭔가 울컥하게 만든다 (야 이 쉐이얏! 그럼 혼자 살앗! 결혼이 가전제품 마련하는 건 줄 알앗! -_-). 저런 마음으로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한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상대에게 속마음을 꽁꽁 감추어두는 예의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저런 마음으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힘들지만 솔직히 저런 마음의 대상이 된다는 상상은 정말 참기 힘들구나.

인터뷰집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을 읽으면서는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 에지위드 댄티캐트, 존 필저, 타르크 알리, 아마르티아 센, 하우나니 카이 트라스크, 후안 곤잘레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벤 바그디키언 등 - 이 많았다. 나에겐 이들이 정말 '시대의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이들이 말이 정말로 '진실'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부족하다. 그래서 번역판의 단정적인, 선정적인 제목이 마음에 안든다. 그럼에도 열심히 읽었고 언젠가 좀 더 자신있게 이들의 말을 다시 한 번 읽고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제나처럼, 여자들의 말에 더 집중을 했고, 아이티 이민자 출신의 미국 소설가 에드위지 댄티캐트와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의 작품들을 읽어보자고 다짐을 했다. 특히 "본 대로 쓰고 쓴 대로 행동한다"는 아룬다티 로이의 선언이 인상적이었기에 다음 읽을 책은 그의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로 하기로 결심했다.

『침대와 책』은 사실 기대를 좀 많이 한 책이었다. 그래서 원했던 것만큼 푹 빠질 수 없어서 아쉬웠다. 블로그에서 읽었더라면, 인터넷 서점에 연재되는 칼럼으로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침대가 없기에) 이부자리 깔아놓고 이불 속에 파묻혀서 읽기엔... 뭐라고 해야 하나, 흥이 나질 않았다. 무언가 급하게, 허둥지둥 만들어서 묶어놓은 것 같은 글들이다. 읽었는데 마음에 아무 흔적이 안 남는 것이 신기하기조차 했다.

반면에 아무 기대 없이 읽은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뜻밖에 재미있다는 생각에 또 좀 놀라버렸다. 작가 나이를 강조하는 마켓팅도 마음에 안 들었고 솔직히 20년 남짓 살아본 사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대단하면 또 얼마나 대단하랴 싶어서 요란한 광고가 실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80년대 생을 강조한 광고들은 마땅치 않고 책에 실린 소설들 역시 그 나이를 뛰어넘는 유별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앞으로 이 사람의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기대를 갖고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침이 고인다』부터 읽어보고. 『달려라 아비』에선 「달려라 아비」의 명랑한 모녀가 제일 좋았고 「스카이 콩콩」의 부자가 제일 별로였다.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 의『The God of Small Things』는 지난 해 읽은 마지막 책이다. 지금 한글판으로 한 번 더 읽고 있고 이걸 다 읽고나서 정리해 봐야겠다. 벌써 몇 년 전인지 헌책방에서 보고 사두었던 책을 책꽂이에 하염없이 꽂아두고 가끔씩 쳐다보며 언젠가 시간을 내야지 하고 다짐만 하고 있었다. 재작년에 읽었던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서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이 '자신을 위해, 정말로 쓰고 싶어서 쓴' 책이라는 말을 읽고부터는 빨리 읽어야지 하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에 실린 로이의 인터뷰를 읽고서 드디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번을 완독한 지금의 마음은 "내가 널 좋아하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이다 :-)


by 싸락눈 | 2008/01/13 19:17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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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청동양심 at 2008/01/13 22:22
양심껏 말씀드리자면, <침대와 책>은 겨우 두 꼭지 읽었지만 전체를 읽어도 싸락눈 님과 비슷한 감상일 것 같고, <책 읽는 여자>는 책보다 영화를 더 재밌게 봤고, 김애란은 <침이 고인다>보단 <달려라, 아비>가 더(혹은 꽤) 낫다고 봅니다. 저 역시 한강의 CD 사건 때문에 저 책을 사기를 아직 꺼리고 있습니다. 서 선생 책은 이전에 사놓고 제대로 펼쳐보지도 않은 그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살까 생각하고 있(그렇다면 과연 언제가 될 것인가...쿨럭)었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목차라도 다시 확인을 해봐야겠군요.
Commented by snowfish at 2008/01/15 02:54
<책 읽어 주는 여자> 영화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파란색을 참 예쁘게 그렸던 영화라는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채식주의자]의 그 구절들에 대해선 제가 뭐라고 길게 주절주절 리플을 썼던 기억이 있는데... 찾을 수가 없군요.
<침대와 책>도 지를까말까 목록에 있는데, 두 분의 감상을 보니 왠지 말까 목록으로 이동시켜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Louise at 2008/01/15 11:01
씽크로 3권!
채식주의자의 저 구절, 싸락눈님에게도 충격이었군요. 책읽어주는여자는, 영화 OST도 좋았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베토벤이었거든요. 한강의 CD사건이라니, 음, 궁금한데요.
Commented by 싸락눈 at 2008/01/15 13:24
이런이런, 덧글이 쌓일수록 [책 읽어주는 여자] 영화를 어떻게든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청동'양심 님은 양심이 참으로 단단하고 반짝거릴 것 같사옵니다. 절대로 털 같은 거 나지 않고요 :D

[채식주의자]의 저 구절을 읽으며 자기 얘기라고 할 사람들도 꽤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좀 슬퍼져요. 다른 건 몰라도 사람에 대해서만은 저러지 말았으면 하고요. 설령 오래 가는 감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일생의 한 번(이상)은 다른 누군가에게 잃어버릴세라 두렵고 아깝고 과분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써 놓고 보니 내가 봐도 유치...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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