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Tom Davenport
Cast
Becky Stark ----- Willa
Caitlin O'Connell ----- Regina
Mark Jaster ----- Otto
John Neville-Andrews ----- Alfonzo
Floyd King ----- Chief Tonka
Sammy Ross ----- Billy Bugg
Jonny Elkes ----- Toby
또 '백설공주'라는데 좀 다르다. 유럽 어딘가의 어두운 숲에서 20세기 초 신대륙의 전원으로의 옮겨지며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많은 것들이 좀 더 현실적이고 소박해졌지만 여기저기 여전히 신기한 동화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눈처럼 하얗고 피처럼 붉은 소녀와 말하는 거울을 가진 냉정한 왕비는 없다. 윌라는 유럽 동화 속의 공주보다 차라리 또 다른 미국 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를 더 닮았다. 착하고 밝고 건강한 시골 소녀이고 소박하게 사랑스럽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연극을 좋아하고 연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인데 아직은 제 방의 인형들 앞에서 종이 인형으로 공연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유명한 연극배우였다는 윌라의 새어머니 레지나는 은퇴공연 후 처음으로 윌라와 함께 살기 위해 저택으로 온다. 레지나에겐 말을 하는 거울 대신 시종인 오토가 있다. 오토는 레지나가 첫 파티에 참석하던 날에도 그녀와 함께였다고 한다. 레지나를 "My Lady"라 부르고 레지나가 자리에 앉을 때면 발받침을 가져다주고 레지나가 그림을 그릴 때면 이젤의 높이를 조절해 주기 위해 아래층에서 이층으로 몇 번이고 오르내리고 레지나가 원한다면 집안을 청소하고 요리를 하고 파티를 준비하며 그녀의 부름에 언제든지 달려가는 그런 사람이다. 레지나가 "나 어떻게 보여? (How do I look?)" 하고 물을 때마다 "여왕 같습니다! (Like a queen!)" 라거나 "아름답습니다 (Lovely)" 하고 대답하는 것도 그의 몫, 말하는 거울보다 훨씬 다정하고 유능하다. 레지나는 모든 것을, 자잘한 일상에서 스스로의 자존감까지를, 그야말로 모든 것을 오토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지나는 동화 속의 새왕비가 되기엔 약한 사람이다. 극의 후반, 윌라가 살아있음을 알고는 명령을 거역한 오토를 스스로 죽여버린 레지나가 완전히 실성해 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윌라와 레지나의 첫 만남에서 윌라가 레지나를 피해 집을 나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의붓딸에게 별 관심이 없던 레지나의 태도가 변한 것은 어느 날 저녁 윌라가 그녀의 앞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로미오를 찾아갔던 줄리엣의 유모가 돌아와서 줄이엣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1인 2역으로 연기하고 나서이다. 윌라는 레지나의 뜻밖의 차가운 태도에 실망하고 상처받지만 사실 질투와 배신감에 더 힘들어하는 사람은 레지나이다. 윌라의 재능과 젊음에 대한 질투와 윌라의 재능을 함께 기뻐하는 오토에 대한 배신감이 레지나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든다. 지루한 시골생활을 달래기 위한 파티가 열리던 날, 레지나와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하고도 신기하리만치 눈치없는 오토가 윌라에게 흰 드레스에 성장을 하고 레지나 앞에 나오게 하면서 터질듯 불안하게 평온을 유지하던 세 사람의 생활은 산산조각이 난다. 늘 떠나온 무대와 관객들의 환호를 그리워하며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던 레지나는 오토의 행동을 나이 먹은 자신을 젊은 윌라에 대비해서 조롱하는 것으로, 일종의 배신으로 해석한다. 레지나의 명령에 칼을 들고 나타난 오토에게 먼저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헤어지기 전 울먹이는 오토에게 다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는 것은 윌라이다.
레지나는 이미 서서히 미치기 시작했고 오토 역시, 윌라를 떠나게 한 죄책감 때문인지 미쳐가는 레지나를 지켜보는 괴로움 때문인지 기운을 잃고 늘어져 버린다. 그런 중에도 레지나는 가끔 "나 어떻게 보여? (How do I look?)" 하고 묻고 오토는 또 힘겹게 "아름답습니다 (Lovely)" 하고 대답한다. 어둡고 우울한 장면들이다. 반면에 집을 떠난 윌라의 사정은 나쁘지 않다. 일곱 난장이 대신 세 명의 떠돌이 메디슨 쇼 (medicine show) 단원들 - 닥터 알폰소 (Dr. Alfonzo), 통카 추장 (Chief Tonka), 빌리 벅 (Billy Bugg) - 이 윌라를 돕는다. 미국의 시골엔 70년대까지도 있었다고 하는 메디슨 쇼는, 우리 나라의 떠돌이 약장수 공연과 비슷한 것 같다. 먼저 노래와 연극을 보여주며 관중을 모으고 나서 효과를 알 수 없는 만병통치약인지 불사약인지, Elixir of Life 를 싼 값에 판다. 이들은 친절한 착한 사람들이지만 속임수를 써서 가짜 약을 판다는 사실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쓰지 않는다. 영화 자체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리더인 알폰소 박사는 '닥터'라고 불리지만 의사가 아니고 통카 추장은 인디언 추장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인데 빌리 벅은 진짜 난장이이다. 알폰소 박사와 통카 추장이 가짜 약을 파는 장면은 정말 재미있다. 이 약을 한 모금 마시면 위장, 간장, 신장이 모두 좋아진다고 나름 차트까지 준비해 놓았다. 윌라는 이 극단의 네 번째 단원이 되어 처음에는 노래를 하다가 연극을 하기 시작한다. 메디슨 쇼 버전의 『백설공주』에서는 난장이 빌리 벅이 백설공주 윌라에게 새왕비를 조심하라고 이르고 일을 하러 가면 여장을 한 통카 추장이 나타나 사과를 건네주고 사과를 한 입 베어먹고 쓰러진 윌라는 Elixir of Life 를 마시고 되살아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남장을 한 윌라가 로미오를, 여장을 한 통카 추장이 맡은 '발코니 위의 줄리엣' - 키가 큰 통카 추장이 발코니 모양의 의상을 입고는 줄리엣과 발코니를 한꺼번에 연기한다 - 을 맡는다. 제대로 된 연기를 해보고 싶은 윌라에게 썩 만족스러운 극들은 아니지만 윌라는 다른 단원들과 친구가 되고 여행도 공연도 즐거워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이 끝나고서 나누는 통카 추장과 윌라의 대화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떠돌이 극단의 배우인 윌라의 왕자가 캘리포니아로 여행 중인 (아마도) 영화 감독 겸 제작자 토비임이 밝혀지는 순간 너무나 그럴 듯한 얘기에 킬킬대며 즐거워했다. 첫눈에 서로에게 끌렸음에 분명한 두 사람의 만남을, 관객을 영화에 뺏기는 바람에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알폰소 박사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장면은 살짝 배우 윌라의 야심작『로미오와 줄리엣』의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박사의 등장 이전 두 사람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함께 읽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인다.
레지나가 윌라에게 사과를 먹이는 장면은 재미있게도 떠돌이 극단의 『백설공주』공연무대에서 일어난다. 윌라는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음에도 무대를 망칠 수 없기에 레지나가 내미는 사과를 베어먹을 수 밖에 없다. 완전히 미쳐버린 레지나의 캐릭터는 둘의 장면이 좀 더 팽팽한 긴장과 대결을 보여주기엔 너무 약해보인다. 먼저 질투하고 악착같이 계략을 꾸미는 왕비 쪽이 착하고 예쁘다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백설공주보다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에 쉽다고 생각했는데 『윌라』의 경우는 거의 반대로 보이는 게 특이하다. 윌라에게 원하는 것과 거기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설정 하나가 많은 것을 바꿔어 놓은 것 같다. 죽은 윌라의 머리맡에서 빌리 벅이 하모니카를 불어주는 장면, 침대 옆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은 통카 추장의 모습, 두 사람이 무덤을 파는 동안 넋을 잃고 앉아있는 알폰소 박사의 얼굴을 보면 윌라가 얼마나 사심없이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오토를 잃고는 완전히 혼자서 외롭게 미쳐버린 레지나는 무대에서 쓰러지는 윌라보다 더 가여워 보인다. 되살아난 윌라를 찍은 토비의 영화가 상연되던 무대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읊으며 불길에 휩싸인 마지막도 그저 측은할 뿐이다.
유럽의 성도 숲도 일곱 명이나 되는 키 작은 배우들도 없는, 저예산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소품인데 얼마나 가난한지:-) 불길에 휩싸인 레지나의 마지막 모습을 찍을 스턴트맨을 고용하는 데 200 달러를 쓸 수가 없어서 감독이 직접 젖은 담요 위에 소방복을 빌려입고 그 위에 또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스턴트 연기를 했다고 한다. 안스러우면서도 웃겼다. 오디션으로 뽑은 생짜 신인 배우 베키 스타크가 9 월이면 새로 대학에 입학하러 떠나야 해서 그 전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데 6 월까지도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않아서 쩔쩔맸다는 말에 역시 그 동네도 가난하게 찍는 TV 영화의 사정은 그리 럭셔리하지 않군요 하기도 했다. 사실 크게 기대하고 본 게 아닌데 예상 외로 재미있고 영리한 이야기였다.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기둥으로 하고 있지만 수많은 다른 이야기들을 연상시키는 자잘한 설정들이 요령있게 섞여있다. 은퇴한 여배우와 충실한 시종의 이야기는 『선셋 대로』를, 레지나의 파티에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윌라의 모습과 경악하는 레지나의 표정은 얼핏 『레베카』를 연상시킨다. 윌라와 토비의 연애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매개로 아주 살짝, 기울어가는 떠돌이 극단 가문과 새로 떠오르는 영화 가문의 딸과 아들이 주위 - 주로 극단 가문 - 의 반대를 무릅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알폰소 박사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TV가 보급되며너 느꼈던 영화인들의 불안을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의 연극인들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근거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오래 되고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 가끔씩 이렇게 영리한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튀어 나온다는 사실이 언제나, 너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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