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홈피에서, '여성주의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이론서를 읽는 게 아니다'란 글을 보고 순간 Orz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읽는다. 뭘 먼저 할 지 고민할 시간에 책 한 권 먼저 읽었다고 뭐 그리 큰 잘못이랴, 책 한 권 읽었다고 나나 세상이 화-악 달라질거라는 환상은 없으니까. 게다가 난 기본적으로 '개론서' - '기본 OOOO', 'OOOO의 역사', 'OOO 개론' 등등의 재미있게 보일까봐 걱정이라도 했는지 하나같이 멋대가리이 제목에다가 환경을 생각하는 재생지 색깔의 누런 종이, 가끔 표나 테이블, 뷁년에 한번씩은 흑백사진까지만 허용한, 까만 벌레같은 글자가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는 - 들을 사랑한다 :-) 읽어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책들이 꽤 된다. 같은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끼리 개론서 한 권을 읽어가며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교환하는 것은, 평생 그런 경험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의 나름대로의 '로망'이다. 뭐, 경험이 없기에 로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다.
[페미니즘 사상]을 혼자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나는 뭐가 맘에 들었고 뭐는 동의할 수 없고 이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졌고 하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아마도 급진적 페미니즘 파트에서 할 얘기가 많았을 것 같다. :D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 아아, 불가능하다 - 그리고, 나 정도의 눈에도 거칠고 극단적인 점이 많긴 하지만, 성과 출산, 어머니 역할에 대한 너무나 근본적이라서 오히려 건드리기 어려운 의문들을 이렇게 '갈데까지 가보자'는 자세로 열심히 이야기한 사람들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고 누구에게나 가장 이성적인 걸로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절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심지어 '진정으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바란다면 다 함께 레즈비언이 되자'는 주장 - 급진적 페미니스트들 모두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 까지 진지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은근히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책의 뒤쪽으로 갈수록 이론들은 점점 세련(?)되고 복잡해진다. 다른 말로 하면 뭔 소린지 알아듣기가 힘들어진다. -_- 그래도 실존주의 페미니즘까지는 뒷장 읽으면서 앞장 찾아가며 어찌어찌 읽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검은 것은 글씨요 누르스름한 것은 종이로구나 하는 심정으로 책장만 넘겼다. 복합문화 페미니즘과 전지구적 페미니즘에 이르러서 조금 숨이 트이는 느낌. 이해할 수 있고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는 얘기들이 나온다. [행복한 페미니즘]의 작가 벨 훅스와 얼마 전 읽었던 [In search of our mother's garden]의 앨리스 워커가 소개되고 있다. '... 여성은 각기 자신의 종족, 계급뿐만 아니라 성적 취향, 나이, 종교, 교육적 달성도, 직업, 결혼 유무, 건강 상태 등에 따라서 여성으로서의 억압을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 여성이 제 1세계 국가 아니면 제 3세계 국가의 시민인가, 선진 공업국가 아니면 개발도상국의 시민인가, 식민지배를 하는 국가 아니면 피지배국가의 시민인가에 따라서 억압을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에코 페미니즘의 여성과 자연의 연과성에 관한 설명은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대해서야 할 말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복합문화 페미니즘이나 전지구적 페미니즘에서처럼 공감할 수는 없었다. 특히 달빛 속에서 춤추고 마술의 주문을 말하며 만트라를 노래하고 요가하고 명상할 것을 권유하는 영적 에코 페미니즘이 생리에 맞지 않았다. 여기가 아발론도 아니고 갑자기 웬 여신숭배란 말이가 싶어서 말이다. 인도의 페미니스트인 칼라 바신이 전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가 마음에 남는다. 영국의 한 언론인으로부터 인도가 영국과 똑같은 생활 수준을 갖기를 바라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영국과 같이 작은 나라가 그러한 생활 수준을 갖기 위해서 이 지구의 절반을 착취해야 했다. 인도가 그와 똑같은 생활 수준을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행성들을 착취해야 할 것인가?" 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 시절 영국의 생활 수준이란 게 인도보다야 월등했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소비사회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될 터인데...

4월 중순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11월에야 다 읽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보다 중간에 휘발된 내용들이 훨씬 많구나... 읽는 것 밖에 할 줄 아는게 없다는 비아냥이 도둑이 제 발 저린 식으로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읽어보자.
그런 의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