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씨의 글은 언제나 단정하고 정연하다. 그의 글을 처음 접한 한겨레 칼럼이나 학위 논문을 다듬었다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이나 그는, 나같은 사람은 목이 막혀 악악거리거나 울다가 제풀에 지쳐버릴 극단적 상황들을 냉정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침착한 태도로 차근차근, 나직한 톤으로 읽어나간다. '매 맞는 여자', '아내 폭력'과 같은 주제를 다룬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비교적 쉽게 읽어나갈 수 있던 것은 그의 이런 스타일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면서 수없이 '맞아, 나도 이렇게 생각했어' 하고 중얼거렸지만 실제로 이만큼 차분하게 정돈된 입장을 가져본 것은 아니다. 마음은 본능적으로 이게 옳다고 하는데 입 안에서만 빙빙 돌고 '그게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상대를 설득시킬 만큼 논리적인 설명이 나오지 않아 가슴만 친 게 한두번이 아니다.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매매 업소를 찾는 사람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성매매 여성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사람만 단속을 받게 되고 그들의 권리가 침해받게 되는 것 아니냐?' 고 했을 때, 마음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신 바보 아냐?'라고 외쳤지만... 입은(손은?) 어버버버, 결국 침묵을 지켜야 했다. 역시 성매매 특별법이나 포르노에 관한 여성주의적 시선에 대해 '페미들 진짜 보수적이다, 이중적이다'라고 꽥꽥거리는
마초, 아니 '살아오던 방식대로 편하게 사는 걸 좋아하고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평범하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지적 능력을 갖춘 일부 남성들('마초'라는 말로 싸잡아 부르지 말아달라는 요구가 부당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름 시도해봤는데... 지나치게 길고 모양이 좋지 않다. 빠뜨린 내용은 없을까?)'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게 아닌데 어떻게 얘기해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싶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게 답답하다고 한마디 할라치면 '유리할 때는 논리를 찾고 불리하면 논리가 다가 아니라고 한다'는 소리도 듣는다. 귀막고 눈감고 사는게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내 목소리 내는 걸 아예 포기하고 사느게 아니라면, 참 피곤하기 짝이 없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신기하게도, 내 답답증의 거의 모든 원인들에 대해 한 꼭지 씩의 위로(?)를 전해준다. 고마워라.
폭력, 인권, 성매매, 노년, 군사주의 등 페미니즘의 거의 모든 관심사들을 다루고 있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희진 씨의 의견에 공감과 동의를 보낼 수 있었지만, 군사주의와 '군 가산제' 문제만큼은 쉽지 않았다. 논쟁이 나올 때마다 나오는 그놈의 '여자들은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찾는다'는 얘기는 분명 짜증스러운데다 그리 맞지도 않아 보인다. 근대 국가에서 여성은 장애인과 함께 권리도 의무도 없는 '2등 시민'이기에 병역의 의무가 면제되었다기보다 배제된 것이라는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다. 군 가산제 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남자들이 보여준 무차별 폭력은 혐오스러웠다. 문제는, 솔직히 말해서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나 자신이 '2등 시민' 취급을 받았음이 그다지 섭섭하지 않았다는 거다. '1등 시민'이 되어 군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굼뜨고, 눈치도 없고, 단체 생활이라면 딱 질색인데다 뛰고 달리는 체력은 또 꽝이다. 말로만 전해 듣곤 하는 여러 가지로 폭력적인 일상을 몇 년씩이나 버틸 자신이 없다. 게다가 지금 직장에서의 경력이 남보다 빠른 이유는 동기들이 군대에 있는 동안 더 공부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군대를 갖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주장은 진정한 믿음이라기 보다 희망 사항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젊은 시절의 몇 년을 군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 가산제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그 면제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겻이다. ...처음부터 면제된 의무를 안 했다고 해서 개인의 권리와 생존권(취업권0을 박탈하거나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대답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 같지 않다. 장애인의 경우는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신체 건강한 성인 여성의 경우엔 말이다. 어려운 문제다.